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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지못한 한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가지를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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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3-17 21:56 조회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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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글-끝까지 읽어 보세요

- 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였던 내가

앞 못 보는 남자와 결혼해서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 인생 사연 입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와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 이었고

나는 여대생 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맬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힘금힐금 쳐다 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 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 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느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때인 열다섯 살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가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느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를 하다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는데

2년 정도 지나 그이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차이 밖에 차이가

나지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 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 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고 하고 ,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의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지 5년째 되던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 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느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전에 유학을 다녀와야 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는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 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땅에서 그르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대필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 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기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할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한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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